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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여행 신라의 봉황대, 그 옛날의 숨결

by bruno1 2025.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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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한복판, 노동리 고분군에 우뚝 선 봉황대. 지금은 관광객의 카메라 셔터 소리와 황리단길의 활기로 북적이지만, 1500년 전 이곳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5세기말에서 6세기 초, 신라의 전성기에 세워진 이 거대한 돌무덤은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다. 왕의 영혼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백성의 믿음이 쌓인 신성한 언덕이었다. 자, 눈을 감고 그 시절 봉황대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황금빛 신라, 봉황대의 시작

5세기말, 신라는 내물왕과 지증왕, 법흥왕의 손길 아래 중앙집권 국가로 발돋움하던 시기였다. 경주는 신라의 심장, 월성을 중심으로 왕궁과 사원, 고분들이 성대하게 들어섰다. 봉황대는 그 황금빛 도시의 한복판, 노동리 고분군에 자리 잡았다. 높이 22미터, 지름 80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돌무덤은 자비 마립간(재위 458~479)이나 고위 귀족의 안식처로 추정된다. 하지만 아직 발굴이 되지 않아, 그 안의 주인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봉황대라는 이름은 신라 사람들이 붙인 것이 아니었다. ‘봉황’은 태평성대와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상서로운 새. 후대 조선 사람들이 이 거대한 봉분을 보고 인공 언덕(조산)이라 오해하며, “봉황이 깃든 전망대”라 낭만적으로 이름 지었다. 신라 시절엔 그저 “왕의 무덤”이었을 이곳, 이름 하나에도 세월의 이야기가 녹아 있다.

 

돌무덤 위의 신비로운 풍경

봉황대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다. 나무로 짠 관 위에 돌과 흙을 쌓아 만든 적석목곽분, 신라의 건축 기술과 믿음이 담긴 상징적 건축물이었다. 낮이면 햇살에 반짝이는 돌무더기가 위엄을 뽐냈고, 밤이면 달빛 아래 신비로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주변은 지금처럼 북적이는 관광지가 아니라 고요한 묘역이었다. 노동리 고분군에는 금관총, 금령총 같은 무덤들이 함께 자리 잡고, 멀리 월성과 반월성의 윤곽이 보였다. 바람이 들판을 스치며 풀잎을 흔들고, 새소리가 고분을 감싸던 평화로운 경주 분지. 이곳은 왕실과 귀족의 영혼이 잠든 신성한 공간이었다.

봉황대 위에는 지금도 서 있는 느티나무가 그때도 있었을지 모른다. 백성들은 그 나무 아래서 소원을 빌었을까? “이 나무에 기도하면 왕의 혼령이 꿈에 나타난다”며 속삭였을지도. 느티나무는 하늘과 땅을 잇는 신령한 존재로 여겨졌고, 봉황대는 단순한 무덤을 넘어 신라의 정신적 중심지였다.

 

제사와 노동, 봉황대의 일상

봉황대는 신라 왕실의 제사 장소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사람들은 무덤을 신성시하며 조상의 영혼을 기리는 의식을 소중히 여겼다. 제사 날이면 왕과 귀족들이 모여 북을 치고 춤을 추며 하늘에 제물을 바쳤다. 향내가 퍼지고, 음악이 울려 퍼지며, 봉황대는 하늘과 대화하는 신성한 무대가 되었다. 백성들은 멀리서 이 거대한 고분을 바라보며 왕실의 위엄에 감탄했다. “저건 어떤 왕의 무덤일까?” 하며 수군대고, 전설을 만들어냈을 터다.

봉황대를 짓는 과정은 신라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수백, 수천의 백성이 돌을 나르고 흙을 쌓았다. 땀 흘리는 노동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영원의 상징을 만든다는 자부심을 느꼈을 것이다. 귀족은 공사를 감독하고, 왕은 이 모든 계획을 이끌었다. 돌 하나하나에 신라의 기술과 믿음이 깃들었다. 이 거대한 언덕은 단순히 죽은 이를 위한 무덤이 아니라, 신라의 꿈과 야망을 담은 증표였다.

 

봉황대에 깃든 설화의 상상

봉황대는 발굴이 안 된 미스터리한 고분이라 기록된 설화는 많지 않다. 하지만 신라의 상징성과 상상력을 빌려 이야기를 그려본다면? 자비 마립간이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영혼이 봉황으로 환생해 하늘로 날아올랐다는 전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백성들은 봉황대 위에서 불타는 새 형상의 구름을 보며 “왕이 신라를 지켜주신다!”라고 믿었을지 모른다. 느티나무 아래서 마을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제사를 지내며, “이 나무에 기도하면 왕의 꿈을 꾼다”라고 속삭였을지도.

봉황은 신라에서 태평성대를 상징했다. 봉황대라는 이름이 후대에 붙여졌더라도, 이곳은 신라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 인간과 신이 만나는 곳이었다. 그들은 이 고분을 보며 영원의 안식을 꿈꿨고, 왕국의 번영을 기원했다.

 

그 시절, 봉황대의 숨결

그 옛날 봉황대에 서면 어떤 풍경이 펼쳐졌을까? 바람에 흔들리는 들판, 멀리 월성의 성곽, 그리고 돌무더기로 둘러싸인 거대한 봉분. 낮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돌무덤이 신라의 위엄을 뽐냈고, 밤에는 달빛이 고분을 은은히 감쌌다.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어우러진 고요 속, 백성들은 이곳에서 하늘과 대화한다고 믿었다. 봉황대는 단순한 무덤이 아니었다. 신라의 꿈과 믿음,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깃든 성지였다.

1500년 전, 봉황대는 신라의 심장이 뛰는 곳이었다. 그곳에 서면, 왕의 영혼이 봉황이 되어 하늘로 날아오르는 듯한 상상을 했을 것이다. 느티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백성, 돌을 나르던 노동자, 제사를 준비하던 귀족. 그들의 손길과 믿음이 오늘의 봉황대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그곳에 서서 느티나무를 올려다볼 때, 어쩌면 그들의 숨결이 아직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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