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궁과 월지에 맹세한 소년, 화랑 준혁
신라의 도읍, 금성. 지금의 경주는 낮에는 고요한 유적이지만, 밤이 되면 고분마다 전설이 숨을 쉰다. 그 밤, 동궁과 월지 물결 위로 달빛이 떨어질 때, 한 화랑의 맹세가 역사를 깨웠다. 이름은 준혁. 아버지를 전쟁에서 잃고 자란 그는 늘 대릉원의 고요한 봉우리를 보며 되뇌었다. “나는 반드시 신라를 지켜낼 것이다.”
그는 동궁과 월지 앞에서 청주 한 잔을 높이 들었다. 맑고 달콤한 술은 삼국유사의 권주가에 등장하는, 신라 화랑들의 피를 뜨겁게 달궈주던 신성한 음료였다. 그 술에 마음을 태워 그는 맹세했다. “신라의 창공을 내 손으로 열겠다.” 이 맹세는 첨성대의 별빛 아래 퍼졌고, 불국사의 종소리가 그에 화답했다.
소문이 돌았다. 대릉원의 고분 어딘가, 금빛 뱀이 금룡검을 지키고 있으며 그것이 깨어날 때 신라의 운명이 바뀐다고. 준혁은 꿩고기와 청주를 챙겨 길을 나섰다. 그가 지나갈 때마다 남산의 바람이 흔들리고, 달빛이 마치 검처럼 그의 길을 가리켰다.
선덕여왕의 계시와 금룡검의 전설
당시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연합군 앞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선덕여왕은 꿈을 꾸었다. 대릉원의 봉우리가 황금빛으로 불타오르고, 금룡검이 하늘을 가르는 광경이었다. 그 꿈은 단순한 상상이 아닌, 나라를 구할 계시였다. 여왕은 말한다. “청주로 맹세한 화랑이 금룡검을 깨우러 가야 한다.”
준혁은 백성들과 청주를 나누고 꿩고기를 함께 굽는다. 태종무열왕이 즐기던 이 고기는 신라의 힘을 상징했고, 청주는 사람들의 혼을 달궜다. 술기운 속에서도 준혁의 눈빛은 또렷했다. 그는 말했다. “이 술은 맹세의 피다. 검이 깨어날 때까지, 나는 돌아오지 않겠다.”
그 길에 남산의 구름이 흩어졌고, 대릉원 고분에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웅크린 채 기도했다. 단 한 사람의 발걸음이, 한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그가 바로 그 주인공이어야 한다고.
고분의 석실과 검의 시험
대릉원의 가장 깊은 봉우리, 이름 없는 왕릉 앞. 준혁은 홀로 섰다. 금빛 뱀이 고분을 휘감고 있었다. 눈은 별처럼 빛났고, 쉭쉭거리는 숨결이 밤을 찢었다. 뱀이 말했다. “너는 금룡검을 들 자격이 있나?”
준혁은 대답 대신 청주를 검 앞에 붓고 말했다. “신라의 혼이 이 술에 담겼다. 나는 백성의 피를 대신하러 왔다.” 뱀은 그 말을 가만히 듣더니, 입을 벌려 석실을 열었다. 그 안에는 찬란한 빛을 뿜는 금룡검이 잠들어 있었다.
그가 검을 잡는 순간, 환영이 펼쳐졌다. 백제와 고구려 연합군이 금성을 포위하고, 첨성대의 별빛은 검게 물들고, 동궁과 월지의 물결은 멈췄다. 불국사의 종은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환영 속에서 준혁은 보았다. 수많은 화랑들이 금룡검을 들고 백성들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 순간, 금빛 뱀이 포효했다.
“금룡검은 단지 무기가 아니다. 이는 신라의 패기요, 백성의 기세며, 청주의 약속이다. 검을 들라. 혼을 깨워라!”
불국사의 함성과 경주의 영혼
“금룡검이 깨어났다!” 누군가 외치자 북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불국사의 종은 다시 울렸고, 첨성대 위로 별빛이 춤췄다. 그 순간, 백제와 고구려의 대군이 밀려들었다. 적의 화살이 하늘을 덮고, 성벽은 무너졌다.
하지만 준혁의 검이 허공을 그을 때마다 금빛 용이 솟아올랐다. 화랑단은 그의 뒤를 따랐고, 청주의 기운으로 날카로워진 창이 적을 찔렀다.
“신라를 지켜라!”
그 함성은 동궁과 월지의 물결을 흔들었고, 대릉원의 봉우리를 울렸다.
전투가 끝났을 때, 적은 흩어졌고 금성은 다시 빛났다. 준혁은 다시 대릉원으로 돌아갔다. 이제 고분은 조용했다. 금빛 뱀도 사라지고, 검도 그의 손에서 벗어나 고분 깊숙이 잠들었다. 하지만 그의 맹세는 남았다.
오늘날 경주를 찾는 이들은 모른다. 그들의 발아래 잠든 고분이 어떤 혼을 품고 있는지, 동궁과 월지의 물결이 어떤 이야기를 비추는지, 불국사의 종소리가 왜 그렇게 쓸쓸한지를.
그러나 어쩌면 어떤 밤, 첨성대 아래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신라의 창공을 가르겠다.”
그건 아주 오래전, 청주의 맹세로 세상을 바꾼 소년의 목소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