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로마 (Roma, 2018)

by bruno1 2025. 4. 21.
반응형

조용한 일상 속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정의 회오리


한 여성의 평범한 삶, 그 안에 담긴 세계의 진동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는 거대한 서사나 격동적인 사건이 아닌, 멕시코시티 중산층 가정의 가사도우미 클레오의 삶을 따라가며 잔잔하게 펼쳐진다. 영화의 배경은 1970년대 초반,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긴장이 일상에 스며들던 시기지만, 이야기는 철저히 한 가정의 내부에서 출발한다.
클레오는 원래 가족의 일부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존재는 명확히 ‘가사노동자’로 규정되어 있다. 그녀는 아이들을 돌보고, 빨래를 하고, 음식을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런 일상 속에도 작고 섬세한 감정의 굴곡이 일어난다. 그녀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연인의 무책임한 태도와 갑작스러운 이별은 그녀를 한순간에 혼자 남겨버린다.

영화는 클레오의 시선으로 전개되며,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의 깊은 동요를 고요하게 포착한다. 흑백으로 촬영된 영상은 실제 기억의 한 조각처럼 흐릿하지만 선명하고, 긴 롱테이크는 사건보다 감정의 흐름을 따라간다. 감독은 클레오의 고통을 드러내기 위해 극적인 연출을 피하고, 그녀의 침묵을 따라가는 방식으로 관객에게 정서적 공감을 유도한다.

아이들을 재우며 자신도 잠에 들고, 가족의 문제를 지켜보면서도 자신의 감정은 늘 뒷전으로 미루는 클레오의 모습은 가부장적 구조와 계급적 억압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녀는 ‘가족’의 일부처럼 여겨지지만, 정작 자신의 고통은 쉽게 무시당한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늘 그 가족을 지켜낸다. 바닷가에서 아이를 구하는 장면은 단순한 영웅적 행동이 아니라, 클레오가 가족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극명히 보여준다. 그 순간, 클레오는 단순한 ‘도우미’가 아니라 이 가족을 구성하는 정서적 중심으로 자리 잡는다.


소외된 존재의 고요한 외침, 기억의 정원에 피어난 존엄

《로마》는 과거의 멕시코를 배경으로 하지만, 그 안에서 울리는 정서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여성, 노동자, 소수자,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이들’의 삶을 담담히 따라가는 이 영화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지워진 사람들의 존재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클레오의 삶은 그 어떤 영웅적 서사보다도 강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그것은 바로 ‘존엄’이다.

클레오가 겪는 일들은 대부분 우리가 일상에서 지나치기 쉬운 것들이다. 그러나 그녀의 하루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그녀가 임신 사실을 감추고 혼자 병원을 찾는 장면, 시위 속을 헤매다 갑자기 총을 마주하는 장면, 그리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담담하게 아이들을 안고 바다에 뛰어드는 모습은, 인간이 어떻게 견디고 살아가는가를 보여준다.

쿠아론 감독은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바탕으로 영화를 구성했지만, 클레오라는 인물에게 모든 감정의 중심을 맡긴다. 이는 단순한 헌정이 아니다. 그 시절을 기억할 때, 가장 고맙고 가장 묵묵히 곁에 있어준 사람이 바로 클레오였음을, 감독은 50년의 시간을 지나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화려하지 않고, 절정도 거의 없다. 그러나 관객은 마지막 장면에서 어느새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클레오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가진다. 조용한 울림, 말 없는 진심, 침묵 속에서 흘리는 눈물이 결국 세상의 소음보다 더 크게 관객의 마음을 울린다. 《로마》는 우리가 쉽게 주목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그들만의 역사와 서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영화다. 그들의 삶은 조명받지 않았지만, 결코 사소하지 않다. 그리고 영화는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고요하게 그러나 힘 있게 관객에게 새긴다.

《로마》는 정적인 화면 속에서도 감정의 파동이 끊이지 않으며,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사회적 맥락 안에서 부유하고 파열되는지를 세심하게 보여준다. 결국 이 영화는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잊히고 지워진 존재를 어떻게 다시 불러내고,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묻는다. 클레오의 이야기는 거창하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에는 삶의 모든 진실이 고요히 녹아 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