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기억 속에서도 존재하려는 한 사람의 분투
삶의 한가운데에서 닥쳐온 알 수 없는 침몰
앨리스 하울랜드는 명문대의 언어학 교수로, 학문적으로나 가족적으로 완벽한 삶을 누리고 있는 중년 여성이다. 그녀는 강의실에서 수많은 학생에게 언어의 아름다움을 가르치며, 세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워낸 지성인이다. 그러나 어느 날 강의 중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는 순간부터 무언가 잘못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자신이 익숙했던 공간에서 방향을 잃고, 익숙한 사람들의 이름조차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결국 ‘조기 발병 알츠하이머’라는 냉혹한 진단을 받는다.
영화는 이 진단을 받은 순간부터 앨리스가 겪는 혼란과 두려움을 담담한 시선으로 따라간다. 앨리스는 자신의 상황을 부정하고 싶지만, 동시에 이 지독한 현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는 지적인 사람이다. 그 인식이 그녀를 더 괴롭히기도 한다. 그녀는 병이 가져올 변화를 빠르게 예감하고, 가족들과의 관계,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 존재의 의미 등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한다. 영화는 과도한 감정에 기대지 않고, 앨리스가 일상의 작은 기억을 잃어가는 과정을 세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 관객이 앨리스의 혼란을 함께 느끼게 만든다는 점이다. 익숙했던 공간이 낯설게 변하고, 자녀의 이름이 뒤섞이고, 거울 속 자신조차 인식되지 않는 순간, 관객도 함께 길을 잃는다. 이 방식은 앨리스의 내면을 극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하며, 그녀가 얼마나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를 체감하게 만든다.
앨리스는 자신의 언어적 능력과 기억을 통해 살아온 사람이다. 그러한 그녀가 언어를 잃고, 사고의 흐름을 붙잡지 못하게 되자 정체성 자체가 흔들린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안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려 한다. 자신의 병을 공개하고, 같은 병을 앓는 이들과의 연대를 시도하며, 삶의 주체로 끝까지 존재하고자 한다. 이 영화의 핵심은 ‘잃어버리는 존재’에 대한 비극보다는, 잃어가면서도 끝까지 ‘존재하려는’ 의지에 있다.
존엄성과 연대, 그리고 존재의 가치에 대한 질문
《스틸 앨리스》는 단순한 병리적 서사가 아니다. 이 영화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통해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기억이 사라져도 존재가 계속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앨리스는 병이 깊어질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잃어가지만, 그녀가 누구였는지는 단지 기억에 의해서만 규정되지 않는다. 가족과의 관계, 삶의 태도, 자신을 대하는 방식이 그녀의 존재를 유지시킨다.
가족은 이 병을 함께 겪는 또 다른 주체로 등장한다. 남편은 처음엔 병을 함께 이겨내려 하지만, 결국 현실의 무게에 지쳐 점차 멀어지고, 자녀들은 각각의 방식으로 어머니의 변화를 받아들인다. 특히 막내딸 리디아는 처음엔 예술을 하는 자신의 삶 때문에 어머니와 갈등을 겪었지만, 결국 가장 깊은 이해자이자 지지자로 변화한다. 앨리스는 자신의 기억이 사라지는 걸 막을 순 없지만, 사랑과 이해는 여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영화 후반, 앨리스는 ‘알츠하이머 협회’에서 환자 당사자로서 연설을 한다. 그 연설은 문장 하나하나를 메모해서 읽어 내려가야 할 만큼 힘든 과정이지만, 그 속에는 병을 이겨내려는 인간의 고귀한 의지와 존엄이 가득하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여전히 나다.” 이 문장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기억이 사라져도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깊은 통찰을 품고 있다.
줄리안 무어는 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으며, 그녀의 연기는 단지 연기를 넘어선 체험처럼 다가온다. 그녀는 병의 초기 혼란에서 후반의 무기력함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붕괴와 생존을 절제된 감정으로 표현해 낸다. 그 덕분에 관객은 단순한 연민이 아닌, 깊은 이해와 공감 속에서 앨리스와 함께 시간을 살아가게 된다.
《스틸 앨리스》는 결국 인간 존재에 대해 묻는다. 기억이 우리 존재의 전부라면, 그것이 사라졌을 때 우리는 누구인가? 하지만 영화는 이렇게 답한다. 기억은 일부일 뿐이고, 관계, 감정, 연대, 의지는 여전히 우리를 지탱하는 것들이며, 사라져 가는 중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수 있다고. 이 영화는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끝까지 ‘존엄’을 지키려는 모든 존재를 향한 찬사다.